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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만남들

5월 적당포럼, 커피 한 잔에 담긴 적당성

커피를 마시는 법

박노해


에티오피아의 커피 농부 유누스가

올해 처음으로 수확한 커피 콩이라며

철판에 볶아 나무절구로 찧어 내린

첫 잔을 내밀며 수줍게 웃는다


나는 금이 간 커피잔을 들어

첫 모금을 마신 후 최고라고 말하려다가

실망어린 유누스의 표정을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챘다


나는 다시, 향기를 맡고 한 모금을 마신 후

천천히 눈을 감고 음미한다

얼마쯤 지났을까 눈을 뜨고 미소지으니

그의 얼굴이 환한 유채꽃이다


그렇지요, 서른을 셀 때까지지요

첫 모금을 마신 뒤 서른을 셀 때까지

가만히 집중해야지요

목을 타고 입을 거쳐 코로 올라오는

커피향이 다섯 번은 변화하지요


에티오피아 커피는

다섯가지 꽃 향기가 연달아 피어나고

다섯가지 과일 맛이 연달아 감돌지요


우리는 커피를 마실 때마다

이 커피콩이 자라난 30년의 시간과

계절의 햇갈과 대지의 바람을 느끼지요


커피를 마실 땐 

지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여운을 느끼는 거지요

그러면 어지러운 상념들이 가라앉고

복잡한 것들이 단순하게 정리되지요


커피를 마시는 곳은 생각의 성소이고

커피를 마시는 일은 마음의 성사지요



적당포럼의 한 컷



적당포럼은 한국에서 대안적 실험을 하는 단체와 공동의 이슈를 도출하여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포럼입니다. 비전화공방의 첫 적당포럼은 적정기업 이피쿱과 함께 했습니다. 이피쿱은 커피를 만드는 노동자들이 모인 협동조합입니다. 적정하게 노동하고 적정한 이윤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적정기업'은 이피쿱을 소개하는 수식어고요. 비전화공방과 함께 '커피 한 잔에 담긴 적당함'은 무엇인지. 커피 한 잔에 어떤 노동이 담겨있고, 어떤 적당함을 고민하고 있는지를 시작으로, 모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당함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물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시작했어요.


직접 볶은 커피를 갈고


첫 자리를 연 이피쿱 김이준수 대표와 비전화공방서울 강내영 단장


커피를 얼마나 볶는지에 따라 신만, 단 맛, 고소한 맛, 쓴맛 다 다릅니다. 우리는 기계가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죠. 자신에게 맞는 맛을 찾아가는 게 적당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몸이 원하는 맛에 집중하는 것. 내가 나에게 가장 적당한 과정을 찾아가면서 직접 볶은 커피를 내려 마시는 즐거움은 덤일거에요. 


이피쿱 김이준수 대표

 


위에 실린 시를 낭독했습니다.



테이블로 나눠져 각자가 바라는 적당함을 주제로 대화했어요. 제가 들어간 테이블에서 나눈 이야기를 전하면요. 적당함이란 '대충하자'와 다르지 않나. 적절하고 알맞다는 뜻과 비슷하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무리하지 않는. 조화로운 상태라 정의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하는 적당함은 폭이 협소해서 모 아니면 도,처럼. 이건 적당하지 않고 저건 적당하다는 식이 많은데요. 사회적으로 적당함의 품을 넓히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서로 공유하는 우리의 실험이 중요하겠다고.  


테이블마다 한 달 간 '커피 한 잔에 담긴 적당성'에 대한 약속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아보겠다는 다짐 같은거죠. 



한 팀은 하루 단식을 약속했어요. 우리가 식사할 때 조리된 먹거리로 단순히 배를 채우거나 끼니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하루 단식을 통해 음식 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고 접하는 기회가 된다는 참여자의 말에 다들 공감하면서 그 팀 사람들은 해보겠다고. (누군가 이 팀의 발표를 듣더니, '세끼 먹는 게 적당한 거 아닐까요?'라는 질문을ㅎㅎㅎ) 단순히 주어진 것을 소비하지 않고 플러그를 뽑듯이 재료의 본질을 찾고 나에게 적당한 맛과 형태를 알아가는 시간으로 단식이 얘기되었다고 해요. 다른 팀은 이렇게 발표했어요. 


저희는 적당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어떻게 적당하게 살 수 있을지를 이야기했어요. 적당하게 살려면 몸의 신호를 잘 들어야 해요. 적당하게 산다는 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선택해야 하는 지점인 것 같아요. 일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적당하지 않아져요. 심플해지는 게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번 달 약속으로 우리는 일을 하기 10분 전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어요.


참여자

 

또 다른 팀은 내 스스로 정의한 적당함이 아니라 사회적 통념과 타인의 시선을 반영하게 됨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선택하고 실패할 기회를 갖겠다고. 한 달 동안 그 사람을 인정하는 '어그래 운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의견을 내거나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어그래"라고 시작한다고 해요.  




테이블마다 모두 다른, 한 달 간 실행해볼 약속이 나왔습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적당함도 다를테고 고민하는 지점이 다를테니. 당연하겠죠. 이런 다양함을 품어내는 게 적당함이겠죠. 자신의 삶에서 추구하는 적당함을 나눌 수 있었던 시간, 늦지 않은 시간 적당하게 마무리되었어요.


다음 시간이 기다려지네요 *_* 참여자의 후기를 마무리로


스스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며 살고 있지만 낯선 사람들을 만나서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아요. 우연한 기회에 알게된 친구가 하는 행사에 어떤 행사인지도 모르고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소중한 경험을 하고 왔습니다. 비전화 방식으로 커피콩을 볶고 느리게 갈아서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소소한 이야기로 시작한 대화로 제 삶의 태도까지 뒤돌아보게 되었어요. 적당하게 일하고 쉬면서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해보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달동안 제 삶에 어떤 작은 변화가 있었는지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다음 포럼에 또 만나요^^



 



글쓴이, 사진 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