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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화저널

#6.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해 내자!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해 내자!

- <사람의 부엌> 류지현 작가와 만남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요리는 뭘까? 각자 다양한 요리를 상상하겠지만, 내겐 ‘카레 1인분’이다. 서울에서 식재료를 1인분만 사는 건 하늘에서 별 따기다. 보관 방법을 잘 모르니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한다는 사명감만 투철하다. 한 솥 끓여둔 카레에 질리면, 외식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렇게 먹어도, 먹어도 냉장고 속 감자는 파랗게 질려간다. 장기여행을 갈 때도 냉장고 플러그를 뽑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며, 뜨끔했다. 플러그를 뽑는 순간, 음식이 썩기 시작할 거라는 불안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불안 때문에 늘 모든 식재료를 냉장고에 보관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가지도 감기에 걸려요.

가지는 따뜻한 나라 인도에서 왔거든요.”


<사람의 부엌>의 저자인 류지현 작가가 비전화공방을 찾았다. 그녀는 모든 식재료를 냉장고에 보관하는 생활 방식에 의문을 던진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냉장고에 들어가면 냉해를 입는 과일이나 채소가 있다. 더운 나라에서 온 가지가 그렇다. 사람이 추우면 감기에 걸리듯, 채소도 추우면 감기에 걸린다. 사람처럼 채소도 체질이 다 다르다. 그녀의 이탈리아 친구는 “냉장고에 들어간 토마토는 도화지 맛이 난다”고 말했다. 토마토는 냉장고에 넣으면 상하는 대표적인 채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냉장고는 ‘만능’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식재료를 사고, 판다. 냉장고에 넣어두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냉장고 안에 켜켜이 음식이 쌓이면, 눈에 닿지 않는 것들은 쉽게 잊힌 채 부패한다. 있는 줄도 몰랐던 식재료가 상한 걸 발견하고 놀라는 일이 반복돼도 개의치 않는다. 아깝지만 다시 사면 그만이다. 결

“손도 안 대고 버릴 음식을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전기를 가동하여 보관하는 셈이다.”(류지현, <사람의 부엌>) 그렇게 전 세계의 음식의 30%가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그런데도 여전히 열 명 중 한 명은 기아에 허덕인다. “매년 버려지는 13억 톤의 음식물 쓰레기는 30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라는 건, 만약 지구가 하나의 기업이라고 가정한다면 결코 두고 볼 수 없는 손실이고 적자잖아요.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 주식회사는 곧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고 그녀는 말한다.


지난 5월 비전화공방을 찾은 류지현 작가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 떠난 여행


우리가 그토록 맹신하는 냉장고가 만들어진 건 불과 107년 전이다. 그녀는 “냉장고가 없던 시간이 인류에게 더 익숙하다”고 말한다. 무심하게 지나치는 장소지만 예전에 부엌은 생명을 관찰하고, 그 관찰을 지혜로 터득하여, 대화를 통해 다음 세대에 전수하던 장이었다. ‘눈과 손, 귀, 피부로 경험하는 이 평등한 지식들’이 사라지는 게 그녀는 못내 안타까웠다. 그것이 7년 전 그녀가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 나선 이유였다.


그녀가 인터뷰한 한 노인은 “냉장고 대신에 냇물이 바닥 아래로

흐르는 작은 방을 사용하곤 했다”고 한다.


파리의  ‘가르드 망제’라는 찬장. 외부와 내부 공기의 온도 차에 의해 더 차가운 공기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원리를 이용한 보관 방법이다.


잎채소를 냉장고 밖에 보관하던 농장의 창고. 수분만 충분히 공급해주면 냉장고 밖에서도 보관할 수 있다. 그녀는 이 농장에서 염소 고기는 냉장고에, 채소는 냉장고 밖에 보관하는 걸 눈여겨 봤다고 한다. 전통과 현대의 방식이 공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3년여 동안 세계 곳곳의 부엌과 텃밭, 크고 작은 농장과 공동체를 찾아다녔다. “그분들이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얘기하게 하거나 발견하기 위해 수다를 떨었어요. 진정한 지식은 직선 문답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녀는 ‘겹겹이 쌓인 삶의 한복판에서만 구할 수 있던 이야기’들을 모아 ‘지식의 선반’을 디자인했다. 선반 하나하나에는 그녀가 그동안 수집해온 냉장고 없는 부엌의 노하우가 담겨있다.


 류지현 디자이너가 만든 ‘지식의 선반’. 식재료 각각의 특성을 이용해 보관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어둠을 좋아하는 감자를 위한 서랍장, 그리고 그 위에 사과를 두는 선반이 있다. 단순해 보이지만 사과의 에틸렌 가스가 감자의 노화를 늦춰 준다는 지혜가 담겨있다.



부엌의 리듬

‘지식의 선반’은 식재료가 한눈에 보인다. 식재료들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사과가 눈에 띄는 곳에 있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생명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이 사소한 알아차림이 변화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무조건 냉장고를 사용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삶의 리듬이 냉장고에 맞춰진 건 아닌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냉장고라는 기계에 모든 걸 떠맡겨 버렸죠. 눈에 보이면 ‘이제 저걸 먹어야 하는구나’ 생각할 텐데 눈에 보이지 않으니 쉽게 외식하러 나가잖아요? 냉장고가 편리함뿐만 아니라 심리적 부담감까지 해결해주는 거죠. 당근이, 감자가, 호박이 시간과 환경에 따라 인간처럼 쇠해 가는 생명이라는 것을 느낄 겨를이 사라졌죠. ‘생명의 리듬’이 아닌 ‘냉장고의 리듬’에 맞춰 사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봤으면 해요.”

슬프게도 우리의 일상은 이 작은 알아차림조차 어려울 만큼 분주하다. 살림살이 또한 넉넉하지 않으니 ‘세일 입맛’은 기본이다. 마트에서 세일하는 음식에 입맛을 맞추고, 장 봐온 재료들을 냉장고에 욱여넣는 것만으로도 생활은 벅차다. 하긴 당근이, 감자가, 호박이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생명이란 걸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먹는 음식이 그저 내일의 노동을 위한 영양소에 불과해도 괜찮은 걸까? 그렇게 우리가 자연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잃어가는 것은 무엇일까. “1+1”으로 식탁은 풍성해졌지만, 보이는 것만큼 안전하지 않다. 냉장고로부터 구해야 할 건 정작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취재/글/편집  우민정

사진 우민희, 류지현

 

*강의 장면 외 자료 사진은  류지현 작가가 제공해주셨습니다. 출처는 www.savefoodfromthefridge.com 입니다.
*비전화공방은 현재 부엌에서 비전화 냉장고를 사용하고 있어요. 올 하반기에는 시민들과 함께 비전화 냉장고를 제작하는 워크숍도 예정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