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화수기공모



지렁이 기르기

황지현



지렁이 데려오기

지렁이를 처음 데려온 건 14년 봄. 지렁이를 분양한다는 글을 보고 통을 챙겨 무작정 서초동의 에코붓다사무실로 향했다. 담당하시는 분께서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주걱으로 지렁이를 푹푹 퍼서 주셨던 게 기억이 난다.


 

지렁이의 집

지렁이를 담은 통을 들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집에 도착해 풀어보니 지렁이가 위독했다!

그제야 지렁이 집을 급조하기 시작했다. 토분이 좋다는데, 밖에 나가서 찾아보니 그날따라 버려진 플라스틱 화분 쪼가리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 그렇다면 있는 걸로 해결하자! 버리려던 스티로폼 박스에 구멍을 뚫고, 신문지를 깔았다. 그리고 한밤중에 뒷산에 올라 흙을 퍼 담았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지렁이 집! 여기에 실신한 지렁이들을 고이 뉘여 드리며 지렁이 기르기가 시작되었다.

 


지렁이의 먹성, 생각 같지 않더라.

물만 주며 적응하는 1주일이 지난 후 음식물쓰레기(이하 음쓰) 먹이기에 도전해보았다. 한쪽 구석을 파고 잘게 썬 야채 부산물, 과일 껍질 등을 넣고 흙으로 잘 덮어주면 된다. 다음번 먹이를 줄때는 다른 한쪽을 또 파고 주는 식이다.



무엇보다 지렁이가 좋아했던 건 축축하게 부숙된 야채였다. 단호박이나 수박 등을 주면 깨끗이 파먹어서 아주 얇은 껍질과 씨앗만을 남겨놓곤 했다. 지렁이들이 바글바글 음쓰에 몰려있을 때의 뿌듯함이란(먹이 때문이 아니라 그냥 지렁이들이 몰려있다면 환경에 문제가 있는것이라고 한다.) 

과일껍질은 단독으로 주면 안 된다고 해서 다른 음식을 줄때 곁들여서 제공. 농약이 묻어있을 확률이 많은 수입과일도 제외, 소금기가 빠진 잔반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혹시 몰라 제외하였다. 간혹 육류나 생선을 먹이는 사람들도 보았지만 거기까진 도전해보지 않았다.



이렇게 엄선해서 지렁이 먹이를 대령하다 보니... 기대했던 것과는 뭔가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지렁이들이 하루 한봉지씩 음식물 쓰레기를 먹어줄 줄 알았는데, 실제로 얘네 들은 고작 하루에 자기 몸의 반정도밖에 먹지를 않았다. 당시 우리집에서 나오는 음쓰를 바로바로 처리하려면 거의 방 하나에 흙을 때려 붓고 지렁이 사육장을 만들어야 할 판이었다.



미처 먹이지 못한 음쓰들이 냉장고에 쌓여갔다. 수박한통 먹고 나서 거의 한달 넘게 수박껍질을 보관했던 기억이 난다. 오직 지렁이에게 먹이기 위해...

얼마 후 나간 지렁이 엄마 모임에서 이 사실을 이야기 하니 밀린 음식물쓰레기를 냉장고에 보관하는 건 본래 취지랑 어긋난다고 해서 상당수의 음쓰를 그냥 버렸다. 그 후 재고를 쌓고 버리기를 반복하며 그냥 처음부터 음쓰를 적게 만들자는 결론을 내렸다. 음식이 상하지 않게 재고 관리를 철저히 하고, 웬만하면 다 먹자!

 


위기

지렁이 기르기가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을 무렵, 먹이를 주려고 지렁이 집으로 갔는데 분명 덮어놓았던 뚜껑이 열려있고 스티로폼 쪼가리가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다. 통을 열고 흙을 파보니 지렁이가 없다?! 몇마리 남아있던 지렁이들이 빠르게 흙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범인은 ''였다. 배수구를 통해 들어온 쥐가 지렁이를 야금야금...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렁이 집 뚜껑은 동물이 열기 힘들게 만들라' 는 교훈을 뒤로 한 채,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새 출발을 했다. 다행히 계절이 가며 지렁이들은 다시 세를 불려나가기 시작했고, 흙은 데글데글하니 비옥해졌다.

 


지렁이의 죽음

이듬해 초여름 이사를 했고 두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수분관리!! 늘 습했던 이전 집과는 달리 새로 이사한 곳은 해와 바람이 잘 통하는 보송보송한 곳이었다. 따라서 축축함이 유지되도록 지렁이 집에 물을 자주 뿌려줘야 했지만 깜빡하기가 일쑤. 이때쯤 밖으로 기어 나와 말라붙어 죽어있는 지렁이가 한두마리씩 발견되기 시작했다. (환경이 맞지 않으면 밖으로 기어 나온다) 그렇게 개체수가 줄어들 무렵 방심하고 며칠 물 관리를 잊어버린 사이 지렁이는 모두 운명하고 만다. 마음이 썰렁했다. 지렁이를 기른지 일년 반 만이었다.

 


그 후의 이야기

지렁이를 기르고 얼마 안 되어 지렁이 집에서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먹고 버린 파프리카 씨앗이 싹을 틔운 것이었다. 조심스레 파서 화분에 옮겨 심었다. 때늦게 발아한 씨앗은 집안에서 겨울을 난 후 옥상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이것이 옥상텃밭의 시작. 그 후 집 근처에 공동 텃밭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5평의 땅을 분양받은 후 지금까지 거기서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다. 지렁이는 갔지만 나에게 새로운 것을 가져다주었다.


옮겨심은 파프리카 싹. 다음해 열매까지 맺었다.

Posted by 비전화공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