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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과 함께하는 비전화공방/비전화수기

[비전화수기] 사우나 같은 폭염엔 차가운 수건이 딱

사우나 같은 폭염엔 차가운 수건이 딱

에어컨 없는 여름의 필수품 수건

열쭝 


 

어쩌다 보니 에어컨 없는 여름을 보냈다. 새로 이사온 집의 침실에는 이전 거주자가 쓰던 에어컨이 있었는데 마침 이것이 고장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새 집은 통풍이 아주 잘 되는 집이었지만 계속되는 폭염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 뒤늦게 에어서큘레이터와 선풍기를 구했는데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올해 나는 백수라서 에어컨 있는 사무실로 피신할 수도 없었다. 카페가 멀진 않지만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찬 물 샤워찬 물에 적신 수건찬 물에 적신 스포츠수건

 

상황이 절박하면 자구책을 만들게 된다. 일단 찬 물을 자주 마시고 찬 물 샤워도 자주 했다. 같은 높이의 옆 건물이 없는 덕분에 집에선 거의 헐벗고 지냈다. 샤워를 한 뒤 물기가 남은 채로 마루에서 선풍기 바람을 쐬면 좀 살 만 했다. 그러나 효과가 오래가진 않았다.

이렇게 수시로 샤워를 하다가 좀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그러면서 물도 아낄 만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엔 찬 물에 적신 수건을 생각했다. 야외에 나갈 때 찬 물에 적신 손수건을 목에 두르면 꽤 오랫동안 시원한데 여기서 착안한 것이다. (비슷한 효과를 노리고 쿨링 스카프도 사용해봤지만 너무 좁은 부위만 커버해서 아쉬웠다.) 효과는 꽤 좋았고 심지어 몸이 너무 차가워져 선풍기를 잠시 끌 정도였다. 그러나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앉은 자리가 물바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대체재로 흡수력이 좋은 스포츠수건을 생각해냈다. 스포츠수건은 일반 수건과 비슷한 재질의 건식과 물기가 있으면 부드럽지만 마르면 딱딱해지는 습식이 있다. 내가 사용한 것은 집에 있던 습식 수건이다. 샤워할 때 걸쳤다가 적당히 물기를 짜내고 두르면 끝.

이렇게 찬 물에 적신 스포츠수건은 꽤 오랫동안 냉기를 보유했다. 너무 축축하지도 않았다. 재질에 따라 다르지만 옷 위에 둘러도 옷이 젖지 않을 정도였다. 선풍기와 함께 사용하면 더욱 시원했다. 밤에는 이 수건을 덮고 잤다. 손수건에 감싼 아이스팩까지 베면 열대야도 견딜 만 했다.

이 수건은 야외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수건을 목에 두르고 다녔더니 한결 더위를 견디기 쉬웠다. 열기 때문에 숨이 막힐 때는 수건을 잠시 얼굴에 대고 있기도 했다. 숨통이 조금 트였다. 사우나 들어갈 때 찬 물을 적신 수건을 갖고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효과였다.

(이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몸 전체에 두르는 대형 사이즈에 UV 효과, 냉감 효과까지 갖춘 수건도 나와있었다. 역시 나만의 노하우는 아닌 듯 하다.)

 

누진세 경감보다 중요한 폭염대책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에어컨 없이 여름을 견디고 보니 좀 뿌듯하다. 수십 년만의 폭염을 에어컨 없이 견뎠으니 내년의 (아마도) 좀더 얌전한 더위도 에어컨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다그렇다고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에어컨을 끊자는 뜻은 아니다.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지. 난 엄청 튼튼하고 아직은 나이가 많지 않고 또 통풍이 잘 되는 꽤 넓은 집에 산다. 지난해에는 좁고 더운 원룸에서 지냈는데, 만일 그 집에 계속 살았다면 에어컨을 꽤 틀었을 게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에어컨을 더위 탈출의 디폴트로 생각하는 것은 여러 모로 안타깝다. 기후변화 측면에서 내년의 더 큰 더위를 땡겨쓰는 사채이고, 무엇보다도 이게 영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않은 방식이라서 더욱 맘에 안 든다. 마치 모든 사람이 언제든 에어컨을 틀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진짜 폭염에서는 에어컨이 없는 사람들의 입장이 더 급하다는 얘기다.

남의 염병이 나의 고뿔만 못하다는 속담이 있다. 남의 큰 고통보다는 내 작은 고통이 중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고뿔부터 치료해달라고 목소리 높이는 것은 염치없고 부끄러운 짓이다. 더워서 짜증이 나고 잠을 설치는 것도 괴롭지만, 적어도 삶이 위협받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폭염대책을 세운다면, 에어컨 누진세가 아니라 에어컨이 더 필요한데도 갖출 수 없는 사람의 생명권을 먼저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당장 가가호호 모든 집에 에어컨을 설치할 수는 없다.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돈도 없고 몸도 약한 사람들이 에어컨 없이도 시원하게 살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나마 내가 스포츠수건을 떠올린 것은 어느 정도 정보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 장애인, 이주민에겐 상대적으로 더 어려울 것이다. 각자가 끙끙대며 고민하지 않아도 되도록, 혼자 폭염에 시들어버리지 않도록 정부가 나서서 대책을 개발하고 지원해야 한다. 그게 나라다.

내년 여름에는 에어컨 없이 시원할 수 있는 방법이 더 많이 만들어지고 관련 제품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시원하게 지내면 좋겠다. 에어컨 없는 사람도 부디 폭염에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