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화수기공모



조건 있는 생활

황진주


나는 이사를 참 여러 번 다녔는데 이번에 사는 집에서는 딱히 누가 놀러 와서 자고 간 기억이 없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젠 나도 남의 집에서 자는 게 편한 일은 아니고 나이가 드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 라는 표현은 상대방에 따라 조심해야 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사실 나이가 들면 좋은 점이 많다. 가장 좋은 점은 내가 하고 싶어라 하던 일을 어느 날 할 수 있게 되는데, 꿈에 그리던 순간을 맞이하는 건 성공 지향적인 한국 사회에서 참 칭찬받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시간을 정신없이 보내다가 이루고 싶던 일을 이루고 나면 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렀나 싶다.


아무튼, 몇 명의 친구가 나 '서울 갈 때 너희 집에서 자도 돼?'라고 물어보면 이룰 게 많았던 어린 시절에는 아무런 고민 없이 '응'이라고 했었는데 요새는 '그럼'이라는 말 뒤에 몇 가지 단서가 붙는다. 딱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어쩌다보니 아직 내 집에 놀러 와서 자고 간 이가 없다. 작은 방에서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 이 글은 내 방에 놀러 오는 이가 없어 아쉬워서 쓰는 글은 아니고, ‘그럼' 뒤에 내가 해야 하는 말 때문에, 마침 이런 걸 반겨주는 데가 있어 적고 있다.


지인들에게 할 말은, 게스트하우스의 내부 시설 안내와 같은 것인데 누구네 집에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 방에는 없기 때문에, 일거리를 들고 모처럼 밖에 나갔더니 카페에 와이파이가 없더라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일러두는 것이다. 때론 내가 커밍아웃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몇 가지의 덧붙이는 조건들로 내 삶의 방식을 홀랑 들키는 기분이다. 나를 이미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러한 말을 꺼내기가 쉽고 가끔 자랑스럽게 얘기하기도 하지만, 어중간한 사이의 관심사가 다를 것 같은 이들 앞에서는 이야기가 저절로 안으로 숨는다.


나는 노푸를 한다. 12월이 되면 3년째가 된다. 그렇게 되었다. 샴푸는 태어났을 때부터 쓰던 거라 처음에 노푸라는 걸 들었을 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를 보면 신기할 뿐이다. 세월을 흘려 보낸 보답을 받는 기분이다. 정신없이 그냥 지나온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가끔 여백이 많은 화장실 수납장을 보며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삶에 대해 묘한 승리를 느낀다. 한국 사회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꿈을 이루고 있다. 노푸를 소망했다기보다 (어릴 적에는 노푸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노푸가 의미하는 생활 방식을 오랫동안 바라왔다. 가질수록 불안해지던 삶이 뺄수록 성취감이 생겼다. 인생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화장실 장 풍경


마른 꽃을 빈 병에 꽂아 화장실 수납함에 얹어 두었다. 이런 일은 인테리어 잡지에서나 일어나는 거짓 상황인 줄 알았는데, 해보니 별거 아니다. ‘근데 나 샴푸 안 써서 집에 없으니까 올 때 샴푸 챙겨와.’ 다행히 '라고 묻는 친구는 없었다. 때론 친구들이 어떻게'라고 묻는다. 방법은 별거 없고 그냥 계속 샴푸를 쓰지 않으면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내가 머리를 안 감는 줄 알아서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합성 계면활성제를 사용하지 않고 머리를 감으면 된다. 때론 더 열심히 감아야 한다. 거품을 만드는 합성물질의 도움을 받지 않고 깨끗하게 머리를 감으려면 손가락으로 열심히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문질러야 한다. 이참에 내 두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탐구하는 기회로 삼아도 괜찮을 거다.


'노푸'를 하며 쓰는 식초와 베이킹 파우더


지나가는 사람의 휘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풍기는 샴푸 향이 이젠 독하다. 나는 점점 무향의 사람이 된다. 그게 편하고 좋다. 그리고 남들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품을 사지 않을 자유가 생겼다. 환경을 생각하는 일에 생활의 불편함이 따를 거라는 편견과 달리 스스로 도전과제를 주고 그걸 해결해나가는 재미가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미션수행이나 게임 속 캐릭터가 장애물을 헤쳐나가는 걸 현실에서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가끔 상대방에게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 딴지를 걸려고 하는 표정이 움찔움찔 보이면 , 이거 제가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라고 나도 모르게 선수를 쳐버린다. ‘'라고 물을 것 같은 표정은 대개 무섭기도 하고 분명 나는 기후변화로 인한 인류 멸망 얘기까지 할 것 같아서 좀 비겁하지만 상대를 봐서 적당한 선까지만 말하게 된다. 재밌어서 하는 건 사실이다.


노푸 덕분에 머리가 떡질까봐 걱정하는 일이 사라졌다. 안 해본 사람들은 좀 믿기 어렵겠지만 머리 감는 방법만 바꿨는데 삶이 꽤 괜찮아진다. 노푸를 시작한 이후 화학 물질과 일회용품의 사용을 줄이려고 화장품, 치약 등을 만들어 쓰고, 면생리대와 생리컵을 사용하고, 또 옥상 텃밭을 가꾸고, 플라스틱 없는 장보기를 시도하고 있다. 계단을 오르듯 한번에 하나씩. 무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해마다 생활의 조건들을 늘려간다

Posted by 비전화공방